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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20. 20世 〉11. <부정공>무본재공휘기엽묘표(務本齋公諱麒燁墓表)
1. 문헌 목록 〉20. 20世 〉13. <부정공>신재공휘문엽행장(新齋公諱文燁行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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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부정공>농은공휘형엽행록(聾隱公諱馨燁行錄)
聾隱公諱馨燁行錄 聾隱公之沒後三十八年其曾孫基永屢請學洙曰吾皇祖生平懿德爲宗族鄕黨之稱焉而當今倫綱頹敗吾兩從皆至衰相使先行無片言隻字之述則恐難免不傳不仁之責也竊望爲狀學洙曰不肖之於公爲生廷之從曾孫而自幼奉承其訓誨者二十三載才素魯鈍不能形容其實蹟之萬一然當時事行非但耳之所聞實爲目擊者指不勝摟則豈敢以巧言麗詞强加采飾取人譏笑而靈若有之受虛譽而無誅乎公生於順天住巖坊詠歸里之居第時 純廟甲子三月二十八日也乳道不治以磨啣爲粥而養之由是胃氣不健見其汚穢則雖當珍差嘔吐而及長氣骨俊秀心志白直愛好人倫事生養庭生致其樂喪致其哀兄及弟矣式相好矣見人不韙處溫恭嘵喩而終不遷善則必正言折責不少饒假創爲族禊香火於先壟者七八歲也曾以漾碧先亭基趾樹木事累訴官庭克復舊蹟又爲冠婚喪祭之具使免其窘以殖鄕約之財使坊民多蒙其惠與族叔福根族弟得燁文燁家姪龍奎鶴奎甥姪金賢相戚姪柳基春鄭仲元鄭潤鉉族弟彦燁等鳩財建塾而興學公主張乎其間而與甥出力尤多貿經史而藏之日用凡百自齋中一一干涉或値花辰以美酒佳肴扶老携幼登山臨水風浴而歸設靑雲禊以備擧子場屋之費爲洞節目立規十餘年庫有餘糓而飢歲則賑人山不童濯而有故則燎庭其養生送死之道如是有二甥愛之如侄一則金公賢相於公少十七歲忠景公益福后憐其單子撫養善導終至至孝二彰門戶一則王公謹鎬於公少十三歲皇朝名進士以文后進士寓公爲之搆屋訖工而仆使之買屋而居凡節皆爲周旋其後王公出守二郡每歎渭陽之己沒且至於奴婢愛之如孫各任紫水之職黎明早起使一洞之 樵牧勤其所業其讀其耕村容漸暖晩年爲孫婦李氏之善養肉食無墨容願豊厚體身肥重乘肩輿則雖健力赤脚一站難抵半堠或曰添年而籍則得壽牒公不悅曰今世級日降邪說蜂起嘵嘵聒聒滔滔皆是則他日賤齒漸高設或有耆社之恩與吾所不可而何可欺國而求爵乎寧隱於靜靜寂寂之中不聽不聽之聽是吾本意也自號曰聾隱公諱馨燁字輝瑞玉川府院君諱元吉十六世孫生考諱邦根使子孫戒鄕曲之出入妣廣州李廷喆女遁村集后性嚴敎子以義考諱澤根剛亢正直人莫敢飾詐妣慶州鄭澯女老松亭知年后公娶光山金鼎女大司成德龍后先公六年癸酉九月十一日卒慈惠勤儉以成家道牙嗣以兄觀燁之子憙奎子之憙奎娶利川徐學寅女又娶長澤高時泰女皆賢淑男鍾琥鍾大徐氏出男鍾閏鍾華女咸陽吳基準寶城宣仁墩高氏出鍾琥有文行而孝娶慶州鄭在衡女牙育娶延安李昌九女判書貴山后以孝烈聞生一男曰基永鍾大娶居昌愼氏女牙嗣而天鍾閏娶慶州金時瓘女有三男寬永縯永啓永側室有三女長適咸陽吳泰雲次適金海金局西次適全州李明洙鍾華出爲再從叔敏奎后娶昇平朴海龍與牙嗣而夭基永娶議官李斗淳女有三女長適延日鄭海國次適朔寧崔成壽次適長水黃華周娶咸安尹銖哲女有一男三女皆幼寬永出爲叔父鍾大后娶木川張鐸烈女牙育又娶陽川許蒹女牙嗣而夭縯永出爲鍾華后娶豊川任泰俊女啓永娶監察鄭啓鉉女生一男幼噫己卯三月十三日即公之易簀皐復也是時地震自西而來則天應有憾地亦有勤耶以公平日事親奉先興學濟人之手段未能一試於聖朝之庭而充耳歛跡空老於叢桂孤松之下悲夫如是勤錄 從曾孫 學洙 謹撰 농은공휘형엽행록(聾隱公諱馨燁行錄) 농은공이 별세하신 후 三十八년에 그 증손 기영(基永)이 자주 학수(學洙)에게 청하기를 『우리 황주 평생의 아름다운 덕을 종족과 향당이 칭송하는데 이제 삼강오륜이 무너지고 우리 두 사촌이 쇠년에 이르렀는데도 선덕에 대하여 다소간의 기술이 없은즉 전하지 아니하면 어질지 못한 견책을 면하기 어려울까 두려우니, 행장을 써 주시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불초 나는 공의 생가(生家)의 종증손으로 어려서부터 그 가르침을 받은것이 二十三년이었으나, 재질이 본디 노둔하여 능히 그 실적의 만에 일도 형용치 못하였다. 그러나 당시 사행을 다만 귀로 들은 것만 아니라 실상 눈으로 본것을 일일이 들어말할 수 없으니 어찌 감히 공교한 말과 고운 글로서 억지로 꾸며 사람의 비웃음을 취하겠는가? 영혼이 만일 계시면, 헛되 명예를 받고 꾸지람이 없겠는가.』 하였다. 공은 순천 주암방(住岩坊) 영귀리(詠歸里) 본가에서 출생하시니, 때는 순조(純祖) 갑자년(一八○四) 三월 二十八일이었다. 유도(乳道)가 부족하여, 미음으로 기르니 위장이 허약하여 더러운 것을 보면, 비록 맛이 있는 음식이라도 구토하더니, 장성하여서는 기골이 준수하고 정직하며 인륜을 사랑하고 좋아하여 생가와 양가를 섬기되 살아서는 그 즐거움을 이루고 죽어서는 그 슬픔을 다하여, 형제간에는 서로 좋아하고 사람의 비리를 보면, 온공하게 깨우치다가 끝내 듣지 아니하면 반드시 바른말로 질책하여 추호의 용서도 없었다. 종계를 창설하여 선영 제위토를 봉한 곳이 七∼八곳이었다. 일찍 선조의 정사인 양벽정(漾碧亭) 자리의 나무의 일로 여러 번 관가에 소소하여 능히, 구적을 회복하였다. 또 관혼상제의 기구를 장만하여 군색함을 면하게 하며 향약의 재정을 증식하여 방민으로 하여금 많이 은혜를 입게 하였다. 족숙 복근(福根) 족제 득엽(得燁) 문엽(文燁) 언엽(彦燁) 조카 용규(龍奎) 학규(鶴奎) 생질 김 현상(金賢相) 척질 유 기춘(柳基春) 정 중원(鄭仲元) 정 윤현(鄭潤鉉)으로 더불어 재물을 모아 서당을 지어 학풍을 일으키고 공이 그 사이에 주장하며 생질과 더불어 출자하여 경사자집 등 서책을 많이 사서 보관하였다. 서재에서 날로 쓰는 모든 물자를 일일이 간섭하고 혹 양춘가절을 당하면 좋은 술과 아름다운 안주로서 늙은이를 붙잡고 어린이를 이끌어 산에 오르고 물에 임하여 소풍하고 목욕한 후에 돌아 왔다. 청운계(靑雲禊)를 창설하여 과거보러 간 자의 여비를 보조하였는데 동리 규약을 세운 十여년에 곡간에는 남은 곡식이 있어 흉년이 들면, 기민을 먹이며 산이 헐벗지 않게 하고 유사시에는 뜰에 불을 밝히었으니 그 산 사람을 기르고 죽은이를 보내는 도리가 이와 같았다. 생질 두 사람을 조카처럼 사랑하였는데 그중 하나인 김 현상(金賢相) 공은 十七세 후배로 충경공(忠景公) 익복(益福)의 후손이다, 고단함을 불쌍히 여겨 어루만져 기르고 착하게 이끌어 마침내 지극한 효도로서 문호를 빛내게 하였다. 또하나는 왕 근호(王謹鎬)공인데 十三세 후배로 명(明)나라 때 진사 이문(以文)의 후예이다. 진사로 숭정(崇禎)말기에 우리나라에 와서 왕공이 서울로부터 와서 우거하니 공이 위하여 집을 지어 낙성한 뒤에 무너지니 또 집을 사서 살게하고 범절을 다 주선하여 주었다. 그 뒤에 왕공이 두 고을의 군수로 있으면서 매양 외숙의 별세를 한탄하였다. 또 노비를 애호하여 각기 땔나무와 물깃는 직책을 말기고 먼동이 틀 무렵 일찍 일어나 동민으로 하여금 각기 생업에 근면하게 하니 마을 형편이 점차 풍요하게 되었다. 말년에는 손부 이씨의 효양을 힘입어 얼굴이 풍후하고 체력이 강건하시니 어떤 사람이 나이를 올려 수직을 얻으라 말하자 공은 듣지 아니하고 말하기를, 『이제 세상에 도의가 날로 떨어져 간사한 말이 벌떼처럼 일러나 떠들썩하고 질펀하다 그러니 후일 내 나이 점차 높아 설혹 기사(者社)의 은전이 있어도 나에게 불가한바 있는데 어찌 나라를 속이고 작록을 구하겠는가 차라리 정적한 가운데 숨어서 듣지 않아야 할 것은 듣지 않는것이 나의 본뜻이다.』 하며 스스로 농은이라 호 하였다. 공의 휘는 형엽(馨燁) 자는 휘서(輝瑞) 옥천부원군 원길(元吉)의 十六세 손으로 생가 선고의 휘는 방근(邦根)인데 자손으로 하여금 향국의 출입을 금하였다. 비는 광주(廣州) 이 정철(李廷喆)의 딸로 둔촌(遁村) 집(集)의 후손인데 성품이 엄정하여 아들을 옳은 길로 인도하셨다. 공의 휘는 택근(澤根)인데 굳세고 높으며 정직하니 사람이 감히 간사한 것을 꾸미지 못하였고 비는 경주(慶州) 정 찬(鄭澯)의 딸로 노송정(老松亭) 지년(知年)의 후예다. 공이 광산(光山) 김 정(金鼎)의 딸에게 장가 들었는데 대사성(大司成) 덕룡(德龍)의 후로 자혜하고 근검하여 가산을 이루었고 공보다 六년 먼저인 계유년 九월 十一일에 별세하였다. 아들이 없어 가형 관엽(觀燁)의 아들 희규(憙奎)로 후사를 삼았다. 희규가 이천(利川) 서 학인(徐學寅) 딸에게 장가들었고, 또 장택(長澤) 고 시태(高時泰)의 딸을 취하였는데 종호(鍾琥) 종대(鍾大)는 서씨 소생이요. 종윤(鍾閏) 종화(鍾華)와 함양(咸陽) 오 기준(吳基準) 보성(寶城) 선 인돈(宣仁墩)의 처는 고씨소생이다. 종호가 문행이 있고 효도하였으며 경주(慶州) 정 재형(鄭在衡)의 딸을 맞아들여 아들이 없으므로 연안(廷安) 이 창구(李昌九)의 딸을 맞았는데 판서 귀산(貴山)의 후손으로 효열로 아름다운 소문이 있었다. 아들은 기영(基永)이요 종대(鍾大)가 거창(居昌) 신씨(愼氏)를 맞았는데 아들 없이 일찍 작고하였다. 종윤(鍾閏)은 경주 김 시관(金時瓘)의 딸을 맞아 三남을 두었는데 관영(寬永) 인영(縯永) 계영(啓永)이요 측실이 낳은 三녀는 함양 오태운 김해 김국서 전주 이명수에게 출가하였다. 종화(鍾華)는 재종숙 민규(敏奎) 후사로 출계하여 승평(昇平) 박해룡(朴海龍)의 딸을 맞았으나 아들 없이 일찍 죽었다. 기영(基永)이 의관(議官) 이 두순(李斗淳)딸과 혼인하여 낳은 三녀는 연일(廷日) 정 해국(鄭海國) 삭녕(朔寧) 최 성수(崔成壽) 장수(長水) 황 화주(黃華周)처요 함안(咸安) 윤 수철(尹銖哲)의 딸을 맞아드려 낳은 一남三녀는 다 어리고 관영은 숙부 종대의 후로 출계하여 목천(木川) 장 탁열(張鐸烈)의 딸을 맞았으나 자식이 없어 또 양천(陽川) 허 겸(許蒹)의 딸을 맞았지만 아들 없이 일찍 죽었다. 인영은 종화의 후로 출계하여 풍천(豊川) 임태준(任泰俊)의 딸을 맞았고 계영은 감찰 정 계현(鄭啓鉉)딸을 맞아 출생한 一남은 아직 어리다. 아! 기묘년 三월 十三일은 바로 공이 운명하신 날이다. 이때에 지진이 서쪽으로부터 일어 났으니 하늘도 서러워하고 땅 또한 감동함이 있는것인가. 공이 평일에 어버이 섬기고 선영을 받들며 학당을 일으키고 사람을 구제한 수단을 가지고 한번 태평성대의 조정에서 재능을 시험하지 못하고 귀를 막고 자취를 거두어 속절 없이 한떨기, 계수와 외로운 소나무 아래에서 늙었으니 이를 슬퍼하여 위와 같이 상가 기록한다. 종증손(從曾孫) 학수(學洙) 삼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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